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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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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 프로이센에서 태어나 19세기 독일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로이센 수상으로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독일 제국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통일 이후에는 초대 독일 제국 총리로서 사회주의 세력 탄압, 사회 복지 정책 추진, 유럽 세력 균형 외교를 펼쳤다. 말년에는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사임했으며, 1898년 사망했다. 그는 '철혈 재상'으로 불리며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었지만, 현실 정치와 권력 유지에 집중한 나머지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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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비스마르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90년의 비스마르크, 그는 대머리이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다.
1890년의 비스마르크
이름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존칭각하
작위비스마르크 공작
출생일1815년 4월 1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작센 현 쇤하우젠
사망일1898년 7월 30일
사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프리드리히스루
안장지비스마르크 영묘
안장지 좌표53°31′38″N 10°20′9.96″E
정당무소속
배우자요한나 폰 푸트카머 (1847년 결혼, 1894년 사별)
자녀마리
헤르베르트
빌헬름
모교괴팅겐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
직업정치인
외교관
작가
농부
공무원
서명
충성독일 연방
프로이센 왕국
소속군프로이센 왕국 육군 란트베어
복무 기간1838년–1839년
최종 계급원수 계급을 가진 상급대장
훈장푸르 르 메리트 훈장 참나무 잎 추가
별명철혈 재상
로마자 표기Otto, Fürst von Bismarck, Graf von Bismarck-Schönhausen, Herzog zu Lauenburg
독일어 별명Eiserner Kanzler
독일어 작위Fürst von Bismarck
정치 경력
임기 시작1871년 3월 21일
임기 종료1890년 3월 20일
군주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
부수상오토 추 슈톨베르크베르니게로데
카를 하인리히 폰 뵈티허
전임직위 신설
후임레오 폰 카프리비
임기 시작1873년 11월 9일
임기 종료1890년 3월 20일
군주빌헬름 1세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
전임알브레히트 폰 론
후임레오 폰 카프리비
임기 시작1862년 9월 23일
임기 종료1873년 1월 1일
군주빌헬름 1세
전임아돌프 추 호헨로에잉겔핑겐
후임알브레히트 폰 론
임기 시작1867년 7월 1일
임기 종료1871년 3월 21일
연방 의장빌헬름 1세
전임직위 신설
후임본인 (독일 제국 제국 수상으로서)
임기 시작1862년 11월 23일
임기 종료1890년 3월 20일
국무총리본인
알브레히트 폰 론
전임알브레히트 폰 베른스토르프
후임레오 폰 카프리비
기타 경력
임기 시작1891년 4월 30일
임기 종료?
임기 시작1862년 5월 22일
임기 종료1862년 9월
임기 시작1859년 4월 1일
임기 종료1862년 4월
임기 시작1854년
임기 종료?
임기 시작1851년 7월
임기 종료1859년 1월
임기 시작1850년 1월
임기 종료?
임기 시작1847년 5월
임기 종료?
임기 시작1849년 2월
임기 종료1852년 3월
하원 의장막시밀리안 폰 슈베린푸차
군사 경력
소속프로이센 왕국 육군
독일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41년 – 1890년
최종 계급원수 직위를 가진 상급대장
1894년 흉갑기병 제복을 입은 비스마르크
소속 부대친위 엽병 대대
제2 엽병 대대

2. 생애

2. 1. 정계 입문 이전

2. 1. 1. 출생과 시대적 배경

1815년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 출신인 아버지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와 어머니 빌헬미네 멘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405]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다음해 1816년, 아버지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는 가족을 데리고 포메른 지방의 크니프호프로 이주했다.

비스마르크는 1815년 4월 1일,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에 속하는 비스마르크 가문 소유의 토지 쇤하우젠(엘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주 귀족(용커)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였다. 어머니는 그의 아내 빌헬미네 폰 비스마르크(옛 성씨 멘켄)[167]였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14세기에 상인 클라우스 폰 비스마르크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비텔스바흐 가문으로부터 귀족 신분과 부르크슈탈의 영토를 하사받은 이래로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용커 가문이었다.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된 이후 16세기에 쇤하우젠으로 영토를 옮겼다.

어머니 빌헬미네의 친가 멘켄 가문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학자 가문이었다. 빌헬미네의 아버지 아나스타지우스 루트비히 멘켄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발탁되어 3대 프로이센 왕에게 내각 비서관으로 봉직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806년에 결혼하여 넷째 아이로 비스마르크를 낳았다.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1815년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퇴하고, 정통주의와 세력 균형을 기조로 한 보수 체제 「빈 체제」가 구축된 해였다.[168]

빈 체제하의 독일 지역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작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하노버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등 39개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했고, 이들 국가는 독일 연방이라는 느슨한 국가 연합을 형성했다.[170]

2. 1. 2. 유년 시절과 교육

1815년 프로이센융커 (지방호족)출신인 아버지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와 어머니 빌헬미네 멘켄 사이에서 태어났다.[405] 1816년, 가족은 포메른 지방의 크니프호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1세의 비스마르크를 궁정화가 프란츠 크뤼거가 1826년에 그린 그림.


1822년 베를린의 플라만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학교의 교육방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405] 비스마르크는 이 학교를 '''교도소'''라고 불렀다. 플라만 학교는 이 설립한 페스타로치의 교육 이념에 바탕을 둔 학교였지만, 비스마르크는 "비정상적인 스파르타식 교육", "마치 감옥 같았다", "이 시절의 기억은 재미없는 것뿐이다"라고 혹평했다. 또한 "만인 평등"의 이념 때문에 귀족 칭호 "폰"이 눈엣가시가 되어 따돌림을 당했다고 회고한다.[171]

이후 1827년부터 1832년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과 에서 교육받았다.[405] 비스마르크에게 김나지움은 플라만 학교에 비하면 더 편안한 곳이었다. 귀족적인 승마에 열중할 수 있었고, 어학에 재능을 발휘하여 특히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에 능숙했다.

1832년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에 가까워졌지만, 결국 에 가입하였다. 법률 학업은 소홀했지만, 의 역사학 강의를 좋아했다.|group=주석}}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나갔다. 베를린 대학교에서도 학업에 열심이 아니었고, 베를린의 사교계 활동에 열심이었다.[176] 독일 관념론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낭만주의에도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프리드리히 실러는 자주 읽었다고 한다.[177]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 영국 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2. 1. 3. 청년 시절

1835년 5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법관시보 시험에 합격한 후, 1835년부터 1836년까지 베를린아헨에서 실무를 익혔다.[409] 아헨에서 국제적인 사교활동을 경험하고, 클리블랜드 공작의 조카딸인 러셀과 연인관계가 되었으나, 1838년에 그녀가 결혼하면서 관계가 끝났다.[409]

1833년, 18세 청년때의 비스마르크


1838년부터 포츠담과 그라이프스발트에서 군 복무를 했다.[409] 1839년 오순절에 군 복무를 마치고, 융커 귀족 사회의 관료주의 체제에 대한 반발로 국가 관료로 활동하는 것을 포기했다.[410] 이후 몇 년간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큐르츠에서 농장 경영주로 생활하며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독서를 통해 자신만의 사상을 수양했다.[410]

1842년 영국, 프랑스, 스위스 등지를 여행했다.[410] 1844년 4월 7일 포츠담의 정부 관청에서 법률 관료로 활동을 재개했지만, 직속상관과의 의견 충돌로 14일 만에 그만두었다.[410]

1843년 경건주의 교우회와 빈번한 접촉을 통해 내면적 전환기를 맞이했다.[411] 특히,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의 교류가 중요했다. 1846년 12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요하나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411][412] 1847년 7월 28일 23세의 요하나와 결혼했다.[411][412]

1857년, 비스마르크의 아내 요하나 폰 푸트카머.


요하나 폰 푸트카머와의 결혼이후 세 아이를 낳았다.

2. 2. 정계 진출

2. 2. 1. 공직 생활 재개와 통합지방의회 의원 활동

1847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통합지방의회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철도 건설 재원 마련을 위한 공채 발행을 위해 소집한 것으로, 온건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왕권 및 융커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적 성향을 보이며, 헌법 제정에 반대하고 국왕 및 융커 계층의 봉건적 관점을 방어했다. 그는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지만, 국왕 및 귀족 계층의 권한 증대를 자신의 주된 과제로 인식했다.[413] 통합지방의회는 철도 건설 공채 발행에 동의하지 않아 조기에 활동을 중단했다.[414]

1850년, 35살의 비스마르크.


1847년, 32세의 비스마르크


1847년,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의회인 *페어아인히히트 란트타크*의 대표로 선출되어 왕당파이자 반동적인 정치인으로서 날카로운 수사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군주가 신권에 의한 통치권을 가진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의 선출은 극단적인 보수파인 게를라흐 형제에 의해 주선되었는데, 그들은 신문인 *노이에 프로이센 차이퉁*의 표지에 철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크로이츠차이퉁"으로 알려졌다.[7]

1849년 2월 5일 비스마르크는 브란덴부르크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독일 통일에 반대하며, 그 과정에서 프로이센이 독립을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르푸르트 의회에서 프로이센 대표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지만, 그 의회의 제안에 더 효과적으로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1850년 3월 20일부터 4월 29일까지 독일 연합 참가국에 의한 에르푸르트 연합 의회가 소집되었고, 비스마르크도 그 의원이 되었지만, 여기서도 독일 연합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2. 2. 2. 3월 혁명

1848년 베를린에서 2월 혁명의 영향[415]을 받아 민중봉기가 발생했다. 혁명의 열기가 거세지자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위협을 느껴 자유주의적 제 권한을 보장하는 헌법 제정을 승인했다. 국왕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연방국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임을 공언했으며, 베를린에 주둔 중인 군대를 포츠담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도 했다.[416]

이후 국왕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혁명적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민중에 대한 군대의 우발적인 발포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군대는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했고, 격렬한 시가전도 펼쳐졌다. 국왕은 이러한 요구를 수렴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제후, 민족과 함께 독일 통합에 매진할 것도 약속했다. 다음 달 4월 초, 자유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신내각이 베를린에서 구성되었고 통합지방의회 소집을 위한 작업도 병행되었다.[416]

1848년 2월 프랑스 왕국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루이 필립의 왕정이 타도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혁명은 독일 연방 여러 邦에도 번져나갔다.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에서는 매일같이 시민권 확대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의 시민 집회가 열렸으나, 3월 18일 국왕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시민군과 국왕군이 충돌하였다(3월 혁명). 국왕은 왕권 유지를 위해 혁명 세력과 손을 잡는 길을 택하여 3월 19일 시내에서 국왕군을 철수시키고 스스로 시민군의 관리하에 들어갔으며, 궁전 안뜰에 안치된 혁명 순국자들 앞에서 탈모하고 자유주의자들로 내각을 구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흑적금 완장을 차고 시내를 행진하였다.[191]

비스마르크는 이 혁명이 발생했을 때 셰ーン하우젠의 자택에 있었다. 후에 비스마르크 자신의 보고에 따르면 3월 20일에 에서 온 사자가 셰ーン하우젠에 와서 흑적금 혁명기를 게양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셰ーン하우젠 교회의 깃발에 프로이센 왕권을 나타내는 검은 십자가를 게양하여 답변하고, 주민들에게 마을 전체의 사냥총을 모으게 하여 궁지에 몰린 국왕을 혁명 세력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베를린 진군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단신 포츠담과 베를린으로 가서 자신의 충정을 알리고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정부에 알렸으나, 이미 국왕이 군대를 철수시켰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제지당했다. 비스마르크는 왕의 동생 카를 왕자의 이름을 사용하여 왕위 계승권자인 황태자 빌헬름 왕자(후의 제7대 프로이센 국왕, 초대 독일 황제)의 배우자 아우구스타와 면담하여 황태자 명의로 국왕의 결정을 취소할 허가를 얻으려 했으나, 아우구스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의 소유자였고, 평생 비스마르크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192][193]

2. 3. 외교관 활동

1857년 10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마비를 일으키는 뇌졸중을 겪었고, 그의 동생 빌헬름이 섭정으로 프로이센 정부를 장악했다. 빌헬름은 처음에는 온건한 통치자로 여겨졌는데,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의 결혼으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적인 영국과의 우정이 그 증거였다. "새로운 시대"의 일환으로 빌헬름은 새로운 장관들을 임명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신문 이름을 따서 ''보헨블라트''(Wochenblatt)로 알려진 온건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1863년 비스마르크(왼쪽), 로온(중앙), 몰트케(오른쪽). 1860년대 프로이센의 세 지도자


섭정은 곧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특사직에서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그를 러시아 제국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했다.[17] 이론적으로는 이것은 승진이었는데, 러시아는 프로이센의 두 가장 강력한 이웃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사건들에서 소외되었고, 프랑스가 1859년 이탈리아 전쟁 동안 오스트리아를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내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약점을 이용하여 스위스 국경의 콘스탄츠 호까지 "남쪽으로 국경을 확장"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프로이센은 라인란트에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의 베네토로의 추가 진격을 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4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부실한 의료 치료로 다리를 거의 잃을 뻔했고, 185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에서 러시아 대표였던 미래의 라이벌인 러시아의 알렉산더 고르차코프 공을 다시 만났다. 섭정은 또한 헬무트 폰 몰트케를 프로이센 군의 새로운 참모총장으로, 알브레히트 폰 로온을 군대 개편 업무를 맡은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12년 동안 비스마르크, 몰트케, 로온은 프로이센을 변화시켰다.[18]

장기간 해외 체류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독일 국내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그는 로온 덕분에 정보에 정통했으며, 비스마르크는 로온과 오랜 우정과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1862년 5월, 그는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파견되었고, 그해 여름에는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문을 통해 그는 여러 적수들과 만나 그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 영국에서는 헨리 존 템플 3세 팔머스턴 자작 수상, 존 러셀 경 외무장관, 보수당 정치인 벤자민 디즈레일리 등이었습니다.

2. 3. 1.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 활동

1851년 5월 15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외교 경험이 전무한 비스마르크에게는 이례적인 인사였는데, 레오폴드 게를라흐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비스마르크만이 프로이센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강력히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국왕 역시 비스마르크의 역량을 알고 있었기에 이를 수용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 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 협조를 주장했으나,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자주 대립하였다. 특히 독일 관세 동맹 문제를 놓고 보호 무역을 추진하려는 오스트리아와 자유 무역을 추진하려는 프로이센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207]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강화를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대결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으로 변화했고, 소독일주의 민족주의와 경제 사상이 반오스트리아 및 프로이센 대국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2. 3. 2. 러시아와 프랑스에서의 외교공사 활동

1859년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17]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러시아 제국차르 알렉산드르 2세와 두터운 친분 관계를 맺었다.[17] 특히 러시아 외상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와는 "손과 장갑과 같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15]

1862년에는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17]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폴레옹 3세의 정책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419] 그는 나폴레옹 3세가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을 관찰하고, 훗날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고자 했다.[419]

1858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


2. 4. 프로이센 수상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빌헬름 1세는 알브레히트 폰 론과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 프로이센군 증강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1860년 2월 10일 론은 하원에 군사력 증강 계획과 예산 확보 방안을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징병 규모 확대, 복무 기간 변경, 추가 군사비 지원 등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군제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시민과 군대의 결속 전통에 위배된다고 우려했다. 빌헬름 1세는 강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고 반박하며, 군제개혁은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이념적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하원은 잠정 예산 승인으로 타협하려 했으나,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다.

1861년 1월 2일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국왕에 즉위했다. 같은 해 12월 프로이센 중의원 총선거에서 독일 진보당이 109석으로 최대 세력이 되었고, 보수당은 15석에 그쳤다. 진보당은 군사비를 포함한 예산 공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켜 군제 개혁을 견제했다.[219] 국왕은 중의원을 해산하고 반자유주의적인 내각을 구성했으나, 1862년 5월 총선에서 진보당이 더욱 약진했다.[220]

정부와 중의원의 협조는 더욱 어려워졌고, 육군대신 로온 중장이 정부의 중심이 되었다. 로온은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정치 위기 해결과 소독일주의, 프로이센 왕권 유지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비 아우구스타(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는 비스마르크를 불신하여 반대했고, 국왕 역시 비스마르크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5월 10일 국왕의 알현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시켰으나, 프로이센-프랑스 통상 조약으로 인한 외교 문제로 인해 총리 임명은 보류되고 주프랑스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1860년의 비스마르크.


군비 확장 문제로 국왕 빌헬름 1세와 의회가 충돌하던 시기에 국방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은 비스마르크만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1862년 9월 18일, 당시 프랑스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지체하면 위험하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론은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가 당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수상 임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19] 비스마르크 역시 빌헬름 1세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론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즉시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9월 20일부터 베를린 근처의 바벨스베르크(Babelsberg)성에 머무르면서 당시 국왕과 의회 사이의 대립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9월 22일 빌헬름 1세는 자신의 계획인 왕권 양위를 실행하기에 앞서 비스마르크와 서너 시간에 걸친 독대를 했다. 여기서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에게 군제 개혁을 완수할 장관으로 취임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의회의 다수 세력에 의해 관철된 사안을 번복시킬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빌헬름 1세의 질문에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대립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견해를 밝혔고, 아울러 그는 빌헬름 1세에게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시대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확고한 자세는 빌헬름 1세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되었다.[221]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하고, 서거할 때까지 깊은 신임을 계속 보여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


1862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프로이센 하원은 군제 개혁을 담은 예산안을 거부하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9월 17일 육군 장관 론이 하원의 타협안 수용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하원은 일시적으로 유화적인 분위기가 되었지만, 같은 날 각의에서 국왕이 병역 3년을 양보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론은 9월 18일에 전날의 타협안 수용 의사 표명을 철회했고, 이에 반발한 하원은 9월 19일에 타협안을 부결했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 분열되었고, 하원과 타협할 의사도 쿠데타의 의사도 없었던 국왕은 퇴위를 결의했지만, 황태자 프리드리히는 간언했다. 황태자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이 퇴위에 대해 왕위의 굴복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222]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9월 18일 론은 파리의 비스마르크에게 "지연은 위험(Periculum in mora). 서둘러라(Dépêchez-vous)"라는 전보를 보냈다.

9월 22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과 포츠담 사이에 있는 바벨스베르크 별궁에서 국왕의 접견을 받았다. 국왕은 군제 개혁을 단행할 용기 있는 대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자신은 왕권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충신이며, 현 상황에서도 입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원의 다수파에 반해서라도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사직자가 나와도 겁내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싸우는 것이 나의 의무다. 나는 퇴위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222]

그리하여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 수상에 임명되었다.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철혈 연설'을 통해 군비 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현재의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닌, 오직 철과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420][421][224][225] 이 연설로 비스마르크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224]

하원의 반발로 예산이 확정되지 못하자,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 시 예산 통과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이용,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했다. 그는 "프로이센이 영국이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 정부는 런던 정부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되었고, 군제 개혁을 둘러싼 분쟁은 헌법 투쟁으로 번졌다.

비스마르크는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감행했다.[422]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납세 거부를 국민들에게 호소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비스마르크의 탄압이 더욱 강화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실상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422]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州) 최북단에 있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동상


1863년 11월 프레드리크 7세 국왕이 사망하자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프레드리크 7세의 후계자인 크리스티안 9세와 덴마크 공작인 프레드리히 폰 아우구스텐부르크가 모두 이 지역을 주장했다. 홀슈타인과 남슐레스비히 주민들이 주로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여론은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10년 전에 체결된 런던 의정서에 따라 해당 영토가 법적으로 덴마크 군주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며 인기 없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크리스티안 9세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완전히 합병하려는 결정을 비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크리스티안 9세에게 슐레스비히를 이전 상태로 되돌릴 것을 최후통첩했다.[21] 덴마크가 거부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침공하여 제2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결국 두 공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비스마르크는 곧 프로이센이 공국의 육군과 해군을 통제해야 한다는 실행 불가능한 요구를 함으로써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원래 독일의 모든 국가가 대표되는 독일 연방 의회가 공국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되었지만, 이 계획이 시행되기 전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가스타인 협약에 동의하도록 유도했다. 1865년 8월 20일에 체결된 이 협정에 따라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받았다. 그 해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쇤하우젠 백작 (''Graf'') 작위를 받았다.[22]

1866년, 오스트리아는 협정을 파기하고 독일 연방 의회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가스타인 협약 위반으로 간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프로이센 군대를 홀슈타인에 주둔시켰고, 오스트리아는 다른 독일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돌입했다.[23] 로온의 군제 개혁으로 프로이센 군은 오스트리아 군과 대등했고, 몰트케의 전략으로 승리했다. 비스마르크는 베네토를 원했던 이탈리아와 비밀 동맹을 맺었고, 이탈리아의 참전은 오스트리아군을 분산시켰다.

빌헬름 1세 국왕과 그의 수행원들(비스마르크, 헬무트 폰 몰트케, 알브레히트 폰 로온 등)이 쾨니히그라츠 전투를 지켜보는 모습


전쟁 중, 코헨-블라인드라는 독일인이 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스마르크는 경상을 입었다.[24] 코헨-블라인드는 구금 중 자살했다.

전쟁은 7주 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북독일, 남독일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으나, 프로이센은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왕과 장군들은 보헤미아를 거쳐 비엔나로 진격하려 했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개입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의 도움으로 국왕을 설득, 영토 병합 없는 "온건한 평화"를 주장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25]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비스마르크가 혼자서 유럽 국제 질서를 변혁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권력 기반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1866년 8월 "나는 그들을 모두 이겼다! 모두!"라고 외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27]

프로이센은 연방 의회에서 소수였으나, 소규모 국가들과의 동맹으로 의회를 통제했다.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로이센의 봉신처럼 행동했다.[26]

1867년 2월 24일 북독일 연방 국회.


1866년 8월 말, 프로이센과 북독일 국가들은 연방 규약을 체결, 북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헌법 제정 의회 설치가 합의되었다.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428]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 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428]

1870년 7월 12일,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머무르고 있던 '엠스 온천'에 가서 '호헨촐레른 가문이 향후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아 내려고 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행동을 즉시 비스마르크에게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왜곡시켜 발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를 모욕했기 때문에 빌헬름 1세 역시 이에 걸맞게 맞대응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이라고 부른다.[428] 이렇게 되면서 양국 사이의 대립은 첨예화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보불전쟁이다.[428]

스당에서의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


일찍부터 개전을 예견했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428] 아울러 그는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전에 중립을 약속받았다.[428]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428]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채 안되어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428]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이듬해 1871년 1월 29일 프랑스 수도 파리시를 점령했다.[428]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립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428] 그리하여 1871년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알자스-로렌 지방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428][425]

1870년 9월 1일 세당 전투 이후 나폴레옹 3세의 항복

2. 4. 1. 군제개혁으로 인한 국왕과 의회의 대립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빌헬름 1세는 알브레히트 폰 론과 헬무트 폰 몰트케에게 프로이센군 증강 방안을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1860년 2월 10일 론은 하원에 군사력 증강 계획과 예산 확보 방안을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징병 규모 확대, 복무 기간 변경, 추가 군사비 지원 등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군제 개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지만,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시민과 군대의 결속 전통에 위배된다고 우려했다. 빌헬름 1세는 강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고 반박하며, 군제개혁은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이념적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하원은 잠정 예산 승인으로 타협하려 했으나,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다.

1861년 1월 2일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국왕에 즉위했다. 같은 해 12월 프로이센 중의원 총선거에서 독일 진보당이 109석으로 최대 세력이 되었고, 보수당은 15석에 그쳤다. 진보당은 군사비를 포함한 예산 공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가결시켜 군제 개혁을 견제했다.[219] 국왕은 중의원을 해산하고 반자유주의적인 내각을 구성했으나, 1862년 5월 총선에서 진보당이 더욱 약진했다.[220]

정부와 중의원의 협조는 더욱 어려워졌고, 육군대신 로온 중장이 정부의 중심이 되었다. 로온은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정치 위기 해결과 소독일주의, 프로이센 왕권 유지를 동시에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비 아우구스타(아우구스타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는 비스마르크를 불신하여 반대했고, 국왕 역시 비스마르크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5월 10일 국왕의 알현을 통해 불안감을 해소시켰으나, 프로이센-프랑스 통상 조약으로 인한 외교 문제로 인해 총리 임명은 보류되고 주프랑스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2. 4. 2. 수상 임명



군비 확장 문제로 국왕 빌헬름 1세와 의회가 충돌하던 시기에 국방부 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은 비스마르크만이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1862년 9월 18일, 당시 프랑스에 있던 비스마르크에게 '지체하면 위험하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론은 빌헬름 1세에게 비스마르크가 당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수상 임명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19] 비스마르크 역시 빌헬름 1세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론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즉시 베를린으로 출발했다. 베를린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9월 20일부터 베를린 근처의 바벨스베르크(Babelsberg)성에 머무르면서 당시 국왕과 의회 사이의 대립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9월 22일 빌헬름 1세는 자신의 계획인 왕권 양위를 실행하기에 앞서 비스마르크와 서너 시간에 걸친 독대를 했다. 여기서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에게 군제 개혁을 완수할 장관으로 취임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 또한 비스마르크가 의회의 다수 세력에 의해 관철된 사안을 번복시킬 수 있는지도 확인하고자 했다. 이러한 빌헬름 1세의 질문에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대립과정에서 군주를 위험에 놓이게 하느니 차라리 그와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견해를 밝혔고, 아울러 그는 빌헬름 1세에게 의회의 기능을 무시한 독재의 시대를 한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확고한 자세는 빌헬름 1세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되었다.[221]

1862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프로이센 하원은 군제 개혁을 담은 예산안을 거부하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9월 17일 육군 장관 론이 하원의 타협안 수용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하원은 일시적으로 유화적인 분위기가 되었지만, 같은 날 각의에서 국왕이 병역 3년을 양보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론은 9월 18일에 전날의 타협안 수용 의사 표명을 철회했고, 이에 반발한 하원은 9월 19일에 타협안을 부결했다.

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 분열되었고, 하원과 타협할 의사도 쿠데타의 의사도 없었던 국왕은 퇴위를 결의했지만, 황태자 프리드리히는 간언했다. 황태자는 자유주의자였지만, 이 퇴위에 대해 왕위의 굴복을 의미한다고 반대했다.[222]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9월 18일 론은 파리의 비스마르크에게 "지연은 위험(Periculum in mora). 서둘러라(Dépêchez-vous)"라는 전보를 보냈다.

9월 22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과 포츠담 사이에 있는 바벨스베르크 별궁에서 국왕의 접견을 받았다. 국왕은 군제 개혁을 단행할 용기 있는 대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퇴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자신은 왕권을 지키는 데 헌신하는 충신이며, 현 상황에서도 입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하원의 다수파에 반해서라도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사직자가 나와도 겁내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싸우는 것이 나의 의무다. 나는 퇴위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222]

그리하여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 수상에 임명되었다.

2. 4. 3. 프로이센 수상으로서의 활동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비스마르크는 '철혈 연설'을 통해 군비 확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현재의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닌, 오직 철과 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420][421][224][225] 이 연설로 비스마르크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224]

하원의 반발로 예산이 확정되지 못하자,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 시 예산 통과에 대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이용,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했다. 그는 "프로이센이 영국이 아니기 때문에 베를린 정부는 런던 정부처럼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로써 의회의 예산권은 무력화되었고, 군제 개혁을 둘러싼 분쟁은 헌법 투쟁으로 번졌다.

2. 4. 4. 조세 징수

비스마르크는 관료와 군대를 장악하고 예산 불승인에도 불구하고 조세 징수를 감행했다.[422]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납세 거부를 국민들에게 호소했으나 그러한 시도는 비스마르크의 탄압이 더욱 강화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실상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422]

2. 4. 5. 덴마크 전쟁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1863년 11월 프레드리크 7세 국왕이 사망하자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프레드리크 7세의 후계자인 크리스티안 9세와 덴마크 공작인 프레드리히 폰 아우구스텐부르크가 모두 이 지역을 주장했다. 홀슈타인과 남슐레스비히 주민들이 주로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프로이센 여론은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10년 전에 체결된 런던 의정서에 따라 해당 영토가 법적으로 덴마크 군주에게 속한다고 주장하며 인기 없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크리스티안 9세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완전히 합병하려는 결정을 비난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크리스티안 9세에게 슐레스비히를 이전 상태로 되돌릴 것을 최후통첩했다.[21] 덴마크가 거부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침공하여 제2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이 발발했다. 덴마크는 결국 두 공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아우구스텐부르크의 승리처럼 보였지만, 비스마르크는 곧 프로이센이 공국의 육군과 해군을 통제해야 한다는 실행 불가능한 요구를 함으로써 그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원래 독일의 모든 국가가 대표되는 독일 연방 의회가 공국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되었지만, 이 계획이 시행되기 전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가스타인 협약에 동의하도록 유도했다. 1865년 8월 20일에 체결된 이 협정에 따라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받았다. 그 해 비스마르크는 비스마르크-쇤하우젠 백작 (''Graf'') 작위를 받았다.[22]

2. 4. 6.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1866년, 오스트리아는 협정을 파기하고 독일 연방 의회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를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가스타인 협약 위반으로 간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프로이센 군대를 홀슈타인에 주둔시켰고, 오스트리아는 다른 독일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하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돌입했다.[23] 로온의 군제 개혁으로 프로이센 군은 오스트리아 군과 대등했고, 몰트케의 전략으로 승리했다. 비스마르크는 베네토를 원했던 이탈리아와 비밀 동맹을 맺었고, 이탈리아의 참전은 오스트리아군을 분산시켰다.

전쟁 중, 코헨-블라인드라는 독일인이 베를린에서 비스마르크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비스마르크는 경상을 입었다.[24] 코헨-블라인드는 구금 중 자살했다.

전쟁은 7주 만에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북독일, 남독일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으나, 프로이센은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왕과 장군들은 보헤미아를 거쳐 비엔나로 진격하려 했으나,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개입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세자의 도움으로 국왕을 설득, 영토 병합 없는 "온건한 평화"를 주장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25]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비스마르크가 혼자서 유럽 국제 질서를 변혁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는 권력 기반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1866년 8월 "나는 그들을 모두 이겼다! 모두!"라고 외칠 정도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27]

프로이센은 연방 의회에서 소수였으나, 소규모 국가들과의 동맹으로 의회를 통제했다.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프로이센의 봉신처럼 행동했다.[26]

1866년 8월 말, 프로이센과 북독일 국가들은 연방 규약을 체결, 북독일 연방을 수립했다. 보통선거로 선출된 헌법 제정 의회 설치가 합의되었다.

2. 4. 7. 보불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68년,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 부르봉 왕가가 쫓겨났고, 혁명 지도자들은 프로이센 빌헬름 1세 국왕의 사촌인 레오폴드 공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였다. 레오폴드 공은 이를 거절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스페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빌헬름 1세는 반대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0년 6월 21일에 수락발표를 해버렸다.[428]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여 프로이센 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철회하라는 문서를 보냈다. 7월 12일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철회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레오폴드 공은 스페인의 왕이 되지 못했고, 스페인에서는 1871년 혁명가 아마데오 1세가 왕으로 선출되었다.[428]

1870년 7월 12일, 프랑스 대사 베네데티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머무르고 있던 '엠스 온천'에 가서 '호헨촐레른 가문이 향후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받아 내려고 했다.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의 무례한 행동을 즉시 비스마르크에게 알렸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왜곡시켜 발표했다. 즉, 비스마르크는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를 모욕했기 때문에 빌헬름 1세 역시 이에 걸맞게 맞대응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한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이라고 부른다.[428] 이렇게 되면서 양국 사이의 대립은 첨예화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보불전쟁이다.[428]

일찍부터 개전을 예견했던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428] 아울러 그는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사전에 중립을 약속받았다.[428]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428]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채 안되어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428]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이듬해 1871년 1월 29일 프랑스 수도 파리시를 점령했다.[428]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립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비스마르크는 가능한 빨리 전쟁을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428] 그리하여 1871년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알자스-로렌 지방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428][425]

2. 5. 독일 제국 수립 후 그의 정책

## 독일 제국 수립 후 그의 정책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90년까지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있었다.[430] 그는 통일 독일의 내부를 통합시키려고 했다.[430] 또한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431] 그는 노련한 외교정책을 펼쳐서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고, 유럽의 세력균형을 이루어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였다.[431]

1873년 비스마르크


1871년, 비스마르크는 ''공작(Fürst)'' 작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독일 제국의 초대 제국 총리(Reichskanzler)로 임명되었지만, 프로이센 총리 및 외무장관직을 포함한 프로이센의 직책들을 유지했다. 그는 또한 중장으로 승진했고 함부르크 근처 프리드리히스루(Friedrichsruh)에 있던 옛 호텔을 사들여 영지로 만들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외무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 비스마르크는 그가 보유한 제국과 프로이센의 직책들 때문에 국내외 정책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다. 프로이센 총리직은 1873년 알브레히트 폰 로온(Albrecht von Roon)이 그 직책에 임명되면서 일시적으로 총리직에서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로온이 건강 문제로 사임하면서 비스마르크는 다시 총리가 되었다.

독일 통일로 독일 각국의 시장이 긴밀해지고 프랑스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획득함으로써 독일 자본주의는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경제 성장 속에서 자본주의의 더욱 발전에 방해가 되는 봉건적 제도의 개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비스마르크는 제국 총리府 장관 루돌프 폰 델브뤽(Rudolph von Delbrück)에게 제국 의회 다수파인 국민자유당 당수 루트비히 밤베르거(Ludwig Bamberger)와 연계하여 자유주의화·근대화 개혁을 실시하게 했다.

화폐의 통일, 다양한 관세의 인하, 중앙은행의 설립, 법률과 재판 제도의 통일화, 군 조례(Kreisordnung) 제정에 의한 융커의 영주 재판권·경찰권의 폐지, 현 조례(Provinzialordnung) 개정에 의한 지방자치의 일정한 실현 등, 수많은 자유주의화·근대화 개혁이 1871년부터 1877년에 걸쳐 추진되었다. 후술하는 문화투쟁도 이 흐름의 하나였다.[281]

그러나 이 일련의 자유주의화·근대화 개혁은 프로이센 보수주의자들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현 조례에 반대하는 프로이센 귀족원을 압도하기 위해 동법안에 찬성하는 신의원을 늘리는 “귀족원 의원 제조 조치”를 취한 1872년에 그것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 강압적인 조치는 육상 로온조차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의 1872년 12월 20일에 비스마르크는 갑자기 프로이센 총리직을 로온에게 넘긴다는 행동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독일 제국 총리·프로이센 외상직에는 재직). 이것은 군무 경험밖에 없는 고령자로 총리의 직무에 감당하지 못할 로온을 고의로 프로이센 총리에 취임시킴으로써 자신이 부재하면 얼마나 정치적 공백이 생기는지를 보여주고, 불복종하는 보수파나 각료의 지지를 되찾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로온은 철도협회 설립의 경비를 둘러싼 의혹을 추궁당하여 1873년 11월에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 총리에 복귀했다.[282]

### 외교 정책

삼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삼국 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제국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러시아-터키 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했다.[432]

1871년 독일 제국의 건국과 함께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 역사에서 결정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프로이센과 새로운 독일 제국의 외교 및 내정 정책을 모두 장악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광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하루아침에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이 역할에서 그는 세력 균형 외교를 사용하여 많은 분쟁과 전쟁 위협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한 유럽에서 독일의 지위를 유지했다.[50]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강력한 새로운 독일 제국에 대해 유럽이 회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경제가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세력 균형에 기반한 유럽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적대적인 연합이 독일을 압도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 중 두 나라가 동맹을 맺으면, 세 번째 나라는 독일이 과도한 요구를 양보할 경우에만 독일과 동맹을 맺을 것이다. 해결책은 세 나라 중 두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1873년 그는 빌헬름 1세,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포함하는 삼황제 동맹(''Dreikaiserbund'')을 구성했다. 그들은 함께 동유럽을 통제하여 폴란드인과 같은 불안한 민족 집단을 통제할 것이다. 발칸 반도는 더 심각한 문제였고, 비스마르크의 해결책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서부 지역을, 러시아에게 동부 지역을 우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체제는 1887년에 붕괴되었다.[59][60]

비스마르크의 주요 문제는 프랑스였다. 1871년 독일이 알자스-로렌 지방 전체를 병합하면서 프랑스와의 평화적인 관계는 불가능해졌다. 여론은 프랑스를 굴욕시키라고 요구했고, 군대는 더 방어적인 국경을 원했다. 비스마르크는 마지못해 이에 응했는데, 프랑스는 결코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에 차라리 이 지방들을 차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는 잘못된 가정이었다. 약 5년 후 프랑스는 진정되었고, 이를 사소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62] 독일의 외교 정책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63][64] 일단 병합이 이루어지자, 타당한 유일한 정책은 프랑스가 강력한 동맹국을 갖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러시아와 친구가 되면서 베를린의 계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905년 러시아가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독일의 러시아와의 동맹 계획은 실패했다.[65]

1877년-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오스만 제국을 승리한 후,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에서 협상을 통해 타협안을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 베를린 조약은 이전의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하여 새로이 건설된 친러시아 국가였던 불가리아 공국의 크기와 주권을 축소시켰다. 비스마르크와 다른 유럽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반대했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존을 시도했다. 그 결과, 러시아 외무장관 고르차코프가 비스마르크를 자국 승리를 훼손했다고 비난하면서 러시아-독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삼황제 동맹이 붕괴된 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중동맹을 협상하여 각국이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서로를 보장했다. 그는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협상했으며,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곧 영국과 "지중해 협정"에 도달했다. 삼황제 동맹은 1881년에 재건되었지만 빠르게 붕괴되어 1813년 이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온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연대가 끝났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러시아의 독일 포위를 막기 위해 1887년 비밀 재보험 조약을 러시아와 협상했다. 양국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하지 않는 한 서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가 사임한 후, 이 조약은 갱신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 (약 1875년)


프란츠 폰 렌바흐(Franz von Lenbach)가 그린 75세 비스마르크의 초상화. 그는 프로이센 근위 퀴라시에(Guards Cuirassiers) 소장(Major General)의 군복을 입고 있다.


1867년 풍자 만화. 비스마르크의 장군, 외무장관, 총리, 사냥꾼, 외교관, 관세동맹 의회 의장(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관세 동맹) 등 다양한 역할을 풍자하고 있다.


### 국내 정책과 문화투쟁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반대 세력, 특히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를 억압하기 위하여 가톨릭 중앙당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공격을 가하였고, 1872년 이후 벌어진 이 투쟁을 '문화투쟁'이라고 부른다.[430] 이러한 투쟁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에 대해 종교를 이유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 데서 시작되었다.[430]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응해 수많은 로마 가톨릭 교회 수도원을 폐쇄하고 주교수사들을 구속하였으며, 가톨릭 수도공동체인 예수회를 추방했다.[433]

독일의 풍자 잡지 《클라데라다취》의 1875년판에 실린 문화투쟁을 풍자한 만화. 왼쪽 인물은 비스마르크이며, 오른쪽 인물이 교황이다.


이에 맞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교회를 지키려고 가톨릭 중앙당을 중심으로 뭉쳐서 저항했다.[434] 이러한 가톨릭 교회 탄압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더욱이 독일 의회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에 맞서기위해서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가 필요해진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을 시작하였다.[435] 그의 문화투쟁에 대해 개신교 일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436]

1871년 3월 30일 실시된 제국 의회 선거에서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이 총 투표수의 5분의 1을 획득하여 국민자유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283] 가톨릭은 남독일과 남서독일, 폴란드에 많았기 때문에 반프로이센적인 분방주의 또는 분리주의와 결합하기 쉬웠다. 또한 가톨릭 인구가 많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결탁할 위험도 있어 독일 통일에 있어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가톨릭의 수장인 로마 교황 피우스 9세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을 “자유주의적”으로 보고 적대시했고, 자유주의 세력 또한 피우스 9세의 무류표와 교황무류설 등 반근대적인 종교 사상을 혐오했다.[284]

이에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가톨릭 탄압 정책인 “문화투쟁”을 시작했다. 먼저 1871년 6월 프로이센 정부 내에서 가톨릭을 대변해 온 프로이센 문부성 가톨릭국을 해산시켰고, 이어 11월에는 제국법으로 형법에 ‘’을 추가하여 성직자가 “공공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교단에서 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지했다. 1872년 1월 23일에는 국민자유당계 반가톨릭파 를 문상으로 임명하고, 교회의 교육에 대한 개입을 배제한 제국법 ‘’을 제정하게 했다.[286]

1871년 가을에는 새로운 주교황청 독일 대사로 피우스 9세의 무류표와 교황무류설에 반대하는 추기경 구스타프 아돌프 폰 호엔로에=실링스휘르스트를 임명하여 피우스 9세를 공개적으로 도발했다. 1872년 5월 교황청이 이 인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에서 “우리는

자유주의파가 혐오하던 가톨릭 강경파인 예수회는 1872년 여름 제정된 제국법 ‘’에 따라 국외 추방 처분을 받았다.

또한 1873년 5월에는 “”이라고 총칭되는 4개의 프로이센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프로이센에서 성직자가 되려면 3년간 대학에서 공부해야 했다. 또한 성직자 임명에 프로이센 주 총독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 시민은 자유롭게 교회를 탈퇴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5월법의 무효를 선언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4년과 1875년에도 가톨릭 탄압 프로이센법 제정을 계속했다. ‘추방령’에 의해 프로이센 정부에 성직자 추방 권한을 부여했다. ‘’에 의해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이센 정부의 보조금을 끊었다. ‘’에 의해 프로이센 국내에 있는 수도원을 모두 폐쇄시켰다(의료 목적의 수도원만 존속이 허용되었다).[289] 또한 종교 의식에 의존하지 않는 제도를 프로이센에 도입했다.

그러나 민사혼인 제도는 프로테스탄트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예수회 금지와 수도원 폐쇄는 자유주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종교 탄압이었기 때문에 가톨릭의 저항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 결과 가톨릭 세력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또한 1870년대 중반부터 정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협조 관계가 종식되고 중앙당의 협력이 필요하게 된 것, 그리고 중앙당보다 더 위험한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한 것 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과의 화해를 생각하게 되지만, 대독 강경파인 교황 피우스 9세가 재위 중인 동안에는 불가능했다. 1878년 2월 9일 피우스 9세가 서거하고, 독일과의 대화 의사가 있는 레오 1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레오 13세는 5월법의 폐지와 문상 팔크의 사임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에 응하여 1879년 7월 팔크를 사임시켰고, 이어 1880년부터 1887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5월법을 폐지하여 문화투쟁을 종식시켰다. 문화투쟁의 여러 정책 중 가톨릭국의 해산, 예수회 금지, 학교감독법, 민사혼인 제도, 교단조항은 유지되었다.[290]

### 사회주의 탄압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민주주의자 탄압법(1878년)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정년제도 등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였다.[437]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금지하는 의 틈을 이용하여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탄압을 극복하였다.[437] 또한 보수당 일부에서도 비스마르크의 사회민주주의 탄압에 대해 반대가 있었다.[436]

결국 사회민주주의 운동 탄압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는 현대 독일정부에서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기 전까지 그 원칙만큼은 사용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성장하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 특히 비폭력적인 독일 사회민주당 (SPD)을 경계했다. SPD의 존재는 독일 헌법 조항에 의해 보호되었기에 비스마르크는 완전한 금지보다는 SPD를 약화시킬 방법을 찾았다. 1878년 그는 사회주의 단체와 집회를 금지하고, 노동 조합을 불법화하며, 신문을 폐쇄하고, 사회주의 문헌의 유통을 금지하는 일련의 탄압적인 반사회주의 법률을 제정했다. SPD는 계속해서 선거에 참여했지만, 경찰관들은 이제 SPD 당원과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수색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많은 당원들이 경찰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법률에도 불구하고 SPD는 의석을 꾸준히 얻었다.

1880년대 동안 비스마르크는 산재 보험과 노령 연금과 같은 긍정적인 사회적 혜택을 시행하고 사회 의료의 한 형태를 개척함으로써 보수 정권에 대한 노동 계급의 충성심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비스마르크 자신도 "실용적인 기독교"라고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를 완전히 분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SPD에 대한 지지는 매 선거마다 증가했다.

비스마르크의 정적이었던 진보당 의원 레오노어 라이헨하임(Leonor Reichenheim)이 소유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비스마르크는 1864년 5월 6일 그 공장에서 일하는 직조공 대표 3명이 국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직조공들은 국왕에게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임금이 삭감되었다"고 호소했고, 국왕은 가능한 한 모든 법적 구제책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 9일에는 비스마르크 자신도 직조공들과 만나 돈을 주는 대신 노동자들 내부에서 진보당과 그 지도자인 공장주를 더 공격하도록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1]

라이헨하임은 임금 인상 요구와 국왕에게 직접 호소에 가담한 직조공 13명을 해고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해고된 13명의 직조공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생산조합을 결성하게 했다.[1] 비스마르크에게는 이것이 실험이었지만, 생산조합을 감독하던 군수와 직조공들의 대립, 상업적 관점의 부재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1]

생산조합을 포기한 비스마르크는 이어서 노동자의 결합권 보호에 나섰다. 1866년 2월 결합권을 금지하는 규정의 일부 폐지를 담은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하원의 반발을 받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발발로 인한 의회 심의 중단으로 무산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법안은 비스마르크가 하원을 장악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인 1869년에 성립되었다.[1]

1875년 5월, 두 사회주의 계파가 합쳐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을 결성했고, 1877년 제국 의회 총선거에서 득표율 9%를 얻어 12석을 획득했다.[300] 곧바로 위협이 될 만한 의석 수는 아니었지만, 혁명을 싫어하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고 조기에 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가 무너져 가는 가운데, 공통의 적인 사회주의 세력을 공격함으로써 국민자유당의 분열을 촉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여당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300]

1878년 5월 11일과 6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황제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범인도 사회주의 세력과의 관계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무리하게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시켰다. 첫 번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지만, 원칙적으로 예외법에 반대하는 국민자유당이 반대표를 던져 부결되었다.[301] 그러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둘러싸고 국민자유당 내에서도 정서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02]

곧바로 두 번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그 보고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안전을 걱정하기 전에 “그렇다면 제국 의회는 해산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303] 보수 신문과 정부 계열 신문을 통해 사회주의자에 대한 공포가 부추겨지는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찬반을 묻는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304]

하지만 이 해산 총선거의 진정한 목표는 직접적인 공격 대상인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아니라, 국민자유당의 분열을 촉진하는 것이었다.[305] 선거 운동 중, 정부 계열 및 보수 계열 신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반대한 국민자유당을 “황제를 지키는 것을 거부했다”며 철저히 비난했다. 선거 운동 중, 국민자유당 후보 대부분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찬성할 것을 공약했다.[306]

선거 결과는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보수당과 제국당이라는 두 보수 정당이 의석을 늘렸고, 국민자유당은 의석을 줄여 보수 정당과 국민자유당이 대등한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10월 19일, “제국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한 국민자유당의 찬성도 얻어 사회주의자 탄압법안이 가결되었다.[304] 결국 자유주의 좌파 세력은 자유무역을 지지하며 국민자유당을 탈당하게 된다.

한편 당사자인 사회주의 노동자당 당수 베벨은 비스마르크가 관변 신문을 이용하여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무리하게 사회주의 세력과 결부시켰다고 비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그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채택되지 않으면 독일은 살인자 무리의 압정에 영원히 시달리게 될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베벨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라살과 접촉했던 사실을 폭로하며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비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라살 개인의 인격을 칭찬함으로써 교묘하게 회피했다.[308]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따라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제국 의회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금지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경찰에 의해 거주지를 옮겨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309] 그러나 다양한 위장 조직과 집회가 계속 열렸고,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세가 약해지는 일은 없었다.

1886년의 비스마르크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정책 입법(Sozialgesetzgebung)을 실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면서 사회정책을 병행하는 통치 수법은 “당근과 채찍”이라고 불렸다.[310] 현재 선진국 어디에도 있는 강제 가입의 사회보험 제도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처음으로 창출되었다. 현재에도 사회보장의 중심은 사회보험이므로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11]

비스마르크는 1880년 8월 28일 프로이센 각의에서 산업재해의 노사 손해 부담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제국 책임법은 소송을 초래하기 쉽고 노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다만 노사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라고 하면서 산재보험 제도 창출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1881년 3월 8일에 제국 의회에 제출한 제1차 산재보험법안은 보험 주체를 제국 정부로 하고, 보험료는 사업주와 노동자가 부담하지만, 연수입 750마르크 이하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업주와 제국 정부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저소득자의 보험료를 국가가 부담함으로써 국가에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비스마르크는 이것을 “국가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국 의회는 1881년 6월 15일에 정부 제출 법안을 대폭 수정한 법안을 가결했다. 그것은 보험 주체를 각 방국 정부로 하고, 보험료는 일률적으로 노사가 부담하는 것으로 국가는 지불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가 의결한 법안에서는 제국 정부의 의도에 반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고 비판하여 연방 참의원에서 부결시키고, 제국 의회 해산에 나섰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반하여 1881년 10월 27일의 선거는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보수당이나 제국당, 국민자유당의 패배, 국민자유당 분리파나 진보당 등 자유주의 세력의 약진으로 끝났다.

1882년 4월에 소집된 의회에 대해 제2차 산재보험법안을 제출하고, 동 법안의 대기 기간 13주를 커버하는 보험으로 질병보험법안도 5월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노동자가 질병으로 취업불능이 되었을 경우의 보험 제도를 규정하고 있으며, 보험료의 3분의 1을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질병보험법안에 대해서는 큰 반발 없이 1883년 5월 31일에 가결되었다. 한편 뒤로 미뤄져 심의된 제2차 산재보험법안은 각 당파의 의견이 맞지 않아, 비스마르크의 뒷공작도 헛수고로 폐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저소득자가 무료로 가입할 수 있는 산재보험법안이 정부 강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과에 불만을 느꼈지만, 일단 질병보험법안 단독으로 연방 참의원을 통과시켜 6월 15일에 질병보험법을 성립시켰다.

1884년 3월 6일에 제3차 산재보험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다. 동 법안은 보험 주체를 산업 분야별 사업자의 모임인 직업 협동조합으로 했다. 보수 정당 외에 국민자유당도 찬성으로 돌아서고, 국민자유당과 정부의 접근을 경계한 중앙당도 찬성으로 돌아섬으로써 마침내 산재보험법이 성립했다. 보험 주체를 직업 협동조합으로 한 것은 각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직능단체로 정리하여 현대판 길드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반항적인 제국 의회를 대신할 국민 대표 기관·입법 기관으로 할 구상도 있었다고 한다.[312]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빌헬름 2세가 즉위한 후인 1888년 11월 2

2. 5. 1. 외교 정책

삼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삼국 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제국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러시아-터키 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 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했다.[432]

1871년 독일 제국의 건국과 함께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 역사에서 결정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프로이센과 새로운 독일 제국의 외교 및 내정 정책을 모두 장악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광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하루아침에 평화주의자로 변신했다. 이 역할에서 그는 세력 균형 외교를 사용하여 많은 분쟁과 전쟁 위협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유지한 유럽에서 독일의 지위를 유지했다.[50]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강력한 새로운 독일 제국에 대해 유럽이 회의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경제가 번영할 수 있도록 하는 세력 균형에 기반한 유럽 현상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적대적인 연합이 독일을 압도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 중 두 나라가 동맹을 맺으면, 세 번째 나라는 독일이 과도한 요구를 양보할 경우에만 독일과 동맹을 맺을 것이다. 해결책은 세 나라 중 두 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1873년 그는 빌헬름 1세,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포함하는 삼황제 동맹(''Dreikaiserbund'')을 구성했다. 그들은 함께 동유럽을 통제하여 폴란드인과 같은 불안한 민족 집단을 통제할 것이다. 발칸 반도는 더 심각한 문제였고, 비스마르크의 해결책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서부 지역을, 러시아에게 동부 지역을 우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체제는 1887년에 붕괴되었다.[59][60]

비스마르크의 주요 문제는 프랑스였다. 1871년 독일이 알자스-로렌 지방 전체를 병합하면서 프랑스와의 평화적인 관계는 불가능해졌다. 여론은 프랑스를 굴욕시키라고 요구했고, 군대는 더 방어적인 국경을 원했다. 비스마르크는 마지못해 이에 응했는데, 프랑스는 결코 잊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에 차라리 이 지방들을 차지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는 잘못된 가정이었다. 약 5년 후 프랑스는 진정되었고, 이를 사소한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62] 독일의 외교 정책은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빠졌다.[63][64] 일단 병합이 이루어지자, 타당한 유일한 정책은 프랑스가 강력한 동맹국을 갖지 못하도록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러시아와 친구가 되면서 베를린의 계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905년 러시아가 프랑스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독일의 러시아와의 동맹 계획은 실패했다.[65]

1877년-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오스만 제국을 승리한 후, 비스마르크는 베를린 회의에서 협상을 통해 타협안을 도출하는 데 기여했다. 베를린 조약은 이전의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하여 새로이 건설된 친러시아 국가였던 불가리아 공국의 크기와 주권을 축소시켰다. 비스마르크와 다른 유럽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반대했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존을 시도했다. 그 결과, 러시아 외무장관 고르차코프가 비스마르크를 자국 승리를 훼손했다고 비난하면서 러시아-독일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삼황제 동맹이 붕괴된 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중동맹을 협상하여 각국이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서로를 보장했다. 그는 188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협상했으며,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곧 영국과 "지중해 협정"에 도달했다. 삼황제 동맹은 1881년에 재건되었지만 빠르게 붕괴되어 1813년 이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온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연대가 끝났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러시아의 독일 포위를 막기 위해 1887년 비밀 재보험 조약을 러시아와 협상했다. 양국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하지 않는 한 서로에 대해 중립을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가 사임한 후, 이 조약은 갱신되지 않았다.

2. 5. 2. 국내 정책과 문화투쟁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반대 세력, 특히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를 억압하기 위하여 가톨릭 중앙당과 로마 가톨릭 교회에 공격을 가하였고, 1872년 이후 벌어진 이 투쟁을 '문화투쟁'이라고 부른다.[430] 이러한 투쟁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개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에 대해 종교를 이유로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한 데서 시작되었다.[430]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응해 수많은 로마 가톨릭 교회 수도원을 폐쇄하고 주교수사들을 구속하였으며, 가톨릭 수도공동체인 예수회를 추방했다.[433]

|섬네일|300px|독일의 풍자 잡지 《클라데라다취》의 1875년판에 실린 문화투쟁을 풍자한 만화. 왼쪽 인물은 비스마르크이며, 오른쪽 인물이 교황이다.]]

이에 맞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교회를 지키려고 가톨릭 중앙당을 중심으로 뭉쳐서 저항했다.[434] 이러한 가톨릭 교회 탄압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더욱이 독일 의회에서 중도좌파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그들에 맞서기위해서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가 필요해진 비스마르크는 교황 레오 13세와 협상을 시작하였다.[435] 그의 문화투쟁에 대해 개신교 일부에서도 반대가 있었다.[436]

1871년 3월 30일 실시된 제국 의회 선거에서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이 총 투표수의 5분의 1을 획득하여 국민자유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283] 가톨릭은 남독일과 남서독일, 폴란드에 많았기 때문에 반프로이센적인 분방주의 또는 분리주의와 결합하기 쉬웠다. 또한 가톨릭 인구가 많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결탁할 위험도 있어 독일 통일에 있어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가톨릭의 수장인 로마 교황 피우스 9세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을 “자유주의적”으로 보고 적대시했고, 자유주의 세력 또한 피우스 9세의 무류표와 교황무류설 등 반근대적인 종교 사상을 혐오했다.[284]

이에 비스마르크는 1871년부터 가톨릭 탄압 정책인 “문화투쟁”을 시작했다. 먼저 1871년 6월 프로이센 정부 내에서 가톨릭을 대변해 온 프로이센 문부성 가톨릭국을 해산시켰고, 이어 11월에는 제국법으로 형법에 ‘’을 추가하여 성직자가 “공공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방식”으로 교단에서 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지했다. 1872년 1월 23일에는 국민자유당계 반가톨릭파 를 문상으로 임명하고, 교회의 교육에 대한 개입을 배제한 제국법 ‘’을 제정하게 했다.[286]

1871년 가을에는 새로운 주교황청 독일 대사로 피우스 9세의 무류표와 교황무류설에 반대하는 추기경 구스타프 아돌프 폰 호엔로에=실링스휘르스트를 임명하여 피우스 9세를 공개적으로 도발했다. 1872년 5월 교황청이 이 인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에서 “우리는

자유주의파가 혐오하던 가톨릭 강경파인 예수회는 1872년 여름 제정된 제국법 ‘’에 따라 국외 추방 처분을 받았다.

또한 1873년 5월에는 “”이라고 총칭되는 4개의 프로이센 법을 제정했다. 이에 따라 프로이센에서 성직자가 되려면 3년간 대학에서 공부해야 했다. 또한 성직자 임명에 프로이센 주 총독이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로이센 시민은 자유롭게 교회를 탈퇴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5월법의 무효를 선언했지만, 비스마르크는 1874년과 1875년에도 가톨릭 탄압 프로이센법 제정을 계속했다. ‘추방령’에 의해 프로이센 정부에 성직자 추방 권한을 부여했다. ‘’에 의해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이센 정부의 보조금을 끊었다. ‘’에 의해 프로이센 국내에 있는 수도원을 모두 폐쇄시켰다(의료 목적의 수도원만 존속이 허용되었다).[289] 또한 종교 의식에 의존하지 않는 제도를 프로이센에 도입했다.

그러나 민사혼인 제도는 프로테스탄트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예수회 금지와 수도원 폐쇄는 자유주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전근대적인 종교 탄압이었기 때문에 가톨릭의 저항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 결과 가톨릭 세력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또한 1870년대 중반부터 정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협조 관계가 종식되고 중앙당의 협력이 필요하게 된 것, 그리고 중앙당보다 더 위험한 사회주의 세력이 등장한 것 등으로 인해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과의 화해를 생각하게 되지만, 대독 강경파인 교황 피우스 9세가 재위 중인 동안에는 불가능했다. 1878년 2월 9일 피우스 9세가 서거하고, 독일과의 대화 의사가 있는 레오 1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레오 13세는 5월법의 폐지와 문상 팔크의 사임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에 응하여 1879년 7월 팔크를 사임시켰고, 이어 1880년부터 1887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5월법을 폐지하여 문화투쟁을 종식시켰다. 문화투쟁의 여러 정책 중 가톨릭국의 해산, 예수회 금지, 학교감독법, 민사혼인 제도, 교단조항은 유지되었다.[290]

2. 5. 3. 사회주의 탄압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민주주의자 탄압법(1878년)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정년제도 등의 사회복지정책을 추진하였다.[437] 그럼에도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금지하는 의 틈을 이용하여 독일 이외의 지역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탄압을 극복하였다.[437] 또한 보수당 일부에서도 비스마르크의 사회민주주의 탄압에 대해 반대가 있었다.[436]

결국 사회민주주의 운동 탄압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사회보장제도는 현대 독일정부에서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기 전까지 그 원칙만큼은 사용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성장하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 특히 비폭력적인 독일 사회민주당 (SPD)을 경계했다. SPD의 존재는 독일 헌법 조항에 의해 보호되었기에 비스마르크는 완전한 금지보다는 SPD를 약화시킬 방법을 찾았다. 1878년 그는 사회주의 단체와 집회를 금지하고, 노동 조합을 불법화하며, 신문을 폐쇄하고, 사회주의 문헌의 유통을 금지하는 일련의 탄압적인 반사회주의 법률을 제정했다. SPD는 계속해서 선거에 참여했지만, 경찰관들은 이제 SPD 당원과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수색할 권한을 부여받았고, 많은 당원들이 경찰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법률에도 불구하고 SPD는 의석을 꾸준히 얻었다.

1880년대 동안 비스마르크는 산재 보험과 노령 연금과 같은 긍정적인 사회적 혜택을 시행하고 사회 의료의 한 형태를 개척함으로써 보수 정권에 대한 노동 계급의 충성심을 얻으려고 시도했다. 비스마르크 자신도 "실용적인 기독교"라고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를 완전히 분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SPD에 대한 지지는 매 선거마다 증가했다.

비스마르크의 정적이었던 진보당 의원 레오노어 라이헨하임(Leonor Reichenheim)이 소유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비스마르크는 1864년 5월 6일 그 공장에서 일하는 직조공 대표 3명이 국왕을 알현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직조공들은 국왕에게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임금이 삭감되었다"고 호소했고, 국왕은 가능한 한 모든 법적 구제책을 강구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 9일에는 비스마르크 자신도 직조공들과 만나 돈을 주는 대신 노동자들 내부에서 진보당과 그 지도자인 공장주를 더 공격하도록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1]

라이헨하임은 임금 인상 요구와 국왕에게 직접 호소에 가담한 직조공 13명을 해고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해고된 13명의 직조공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생산조합을 결성하게 했다.[1] 비스마르크에게는 이것이 실험이었지만, 생산조합을 감독하던 군수와 직조공들의 대립, 상업적 관점의 부재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1]

생산조합을 포기한 비스마르크는 이어서 노동자의 결합권 보호에 나섰다. 1866년 2월 결합권을 금지하는 규정의 일부 폐지를 담은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지만, 하원의 반발을 받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발발로 인한 의회 심의 중단으로 무산되었다. 최종적으로 이 법안은 비스마르크가 하원을 장악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인 1869년에 성립되었다.[1]

1875년 5월, 두 사회주의 계파가 합쳐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을 결성했고, 1877년 제국 의회 총선거에서 득표율 9%를 얻어 12석을 획득했다.[300] 곧바로 위협이 될 만한 의석 수는 아니었지만, 혁명을 싫어하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적”으로 간주하고 조기에 탄압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가 무너져 가는 가운데, 공통의 적인 사회주의 세력을 공격함으로써 국민자유당의 분열을 촉진하여 자유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여당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300]

1878년 5월 11일과 6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황제 빌헬름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어느 범인도 사회주의 세력과의 관계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무리하게 사회주의 운동과 결부시켰다. 첫 번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지만, 원칙적으로 예외법에 반대하는 국민자유당이 반대표를 던져 부결되었다.[301] 그러나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둘러싸고 국민자유당 내에서도 정서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02]

곧바로 두 번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그 보고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안전을 걱정하기 전에 “그렇다면 제국 의회는 해산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303] 보수 신문과 정부 계열 신문을 통해 사회주의자에 대한 공포가 부추겨지는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탄압법의 찬반을 묻는 해산 총선거를 실시했다.[304]

하지만 이 해산 총선거의 진정한 목표는 직접적인 공격 대상인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아니라, 국민자유당의 분열을 촉진하는 것이었다.[305] 선거 운동 중, 정부 계열 및 보수 계열 신문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반대한 국민자유당을 “황제를 지키는 것을 거부했다”며 철저히 비난했다. 선거 운동 중, 국민자유당 후보 대부분은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찬성할 것을 공약했다.[306]

선거 결과는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보수당과 제국당이라는 두 보수 정당이 의석을 늘렸고, 국민자유당은 의석을 줄여 보수 정당과 국민자유당이 대등한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10월 19일, “제국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한 국민자유당의 찬성도 얻어 사회주의자 탄압법안이 가결되었다.[304] 결국 자유주의 좌파 세력은 자유무역을 지지하며 국민자유당을 탈당하게 된다.

한편 당사자인 사회주의 노동자당 당수 베벨은 비스마르크가 관변 신문을 이용하여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을 무리하게 사회주의 세력과 결부시켰다고 비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그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대신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채택되지 않으면 독일은 살인자 무리의 압정에 영원히 시달리게 될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베벨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라살과 접촉했던 사실을 폭로하며 사회주의자 탄압법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비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라살 개인의 인격을 칭찬함으로써 교묘하게 회피했다.[308]

사회주의자 탄압법에 따라 사회주의자의 활동은 제국 의회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금지되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은 경찰에 의해 거주지를 옮겨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309] 그러나 다양한 위장 조직과 집회가 계속 열렸고,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당세가 약해지는 일은 없었다.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정책 입법(Sozialgesetzgebung)을 실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면서 사회정책을 병행하는 통치 수법은 “당근과 채찍”이라고 불렸다.[310] 현재 선진국 어디에도 있는 강제 가입의 사회보험 제도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에서 처음으로 창출되었다. 현재에도 사회보장의 중심은 사회보험이므로 비스마르크는 “사회보장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11]

비스마르크는 1880년 8월 28일 프로이센 각의에서 산업재해의 노사 손해 부담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제국 책임법은 소송을 초래하기 쉽고 노사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다만 노사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라고 하면서 산재보험 제도 창출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1881년 3월 8일에 제국 의회에 제출한 제1차 산재보험법안은 보험 주체를 제국 정부로 하고, 보험료는 사업주와 노동자가 부담하지만, 연수입 750마르크 이하의 노동자의 경우에는 사업주와 제국 정부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저소득자의 보험료를 국가가 부담함으로써 국가에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비스마르크는 이것을 “국가사회주의”라고 불렀다.

그러나 제국 의회는 1881년 6월 15일에 정부 제출 법안을 대폭 수정한 법안을 가결했다. 그것은 보험 주체를 각 방국 정부로 하고, 보험료는 일률적으로 노사가 부담하는 것으로 국가는 지불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제국 의회가 의결한 법안에서는 제국 정부의 의도에 반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고 비판하여 연방 참의원에서 부결시키고, 제국 의회 해산에 나섰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의도에 반하여 1881년 10월 27일의 선거는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보수당이나 제국당, 국민자유당의 패배, 국민자유당 분리파나 진보당 등 자유주의 세력의 약진으로 끝났다.

1882년 4월에 소집된 의회에 대해 제2차 산재보험법안을 제출하고, 동 법안의 대기 기간 13주를 커버하는 보험으로 질병보험법안도 5월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노동자가 질병으로 취업불능이 되었을 경우의 보험 제도를 규정하고 있으며, 보험료의 3분의 1을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으로 했다. 질병보험법안에 대해서는 큰 반발 없이 1883년 5월 31일에 가결되었다. 한편 뒤로 미뤄져 심의된 제2차 산재보험법안은 각 당파의 의견이 맞지 않아, 비스마르크의 뒷공작도 헛수고로 폐기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저소득자가 무료로 가입할 수 있는 산재보험법안이 정부 강화에 기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결과에 불만을 느꼈지만, 일단 질병보험법안 단독으로 연방 참의원을 통과시켜 6월 15일에 질병보험법을 성립시켰다.

1884년 3월 6일에 제3차 산재보험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다. 동 법안은 보험 주체를 산업 분야별 사업자의 모임인 직업 협동조합으로 했다. 보수 정당 외에 국민자유당도 찬성으로 돌아서고, 국민자유당과 정부의 접근을 경계한 중앙당도 찬성으로 돌아섬으로써 마침내 산재보험법이 성립했다. 보험 주체를 직업 협동조합으로 한 것은 각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는 직능단체로 정리하여 현대판 길드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 반항적인 제국 의회를 대신할 국민 대표 기관·입법 기관으로 할 구상도 있었다고 한다.[312]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빌헬름 2세가 즉위한 후인 1888년 11월 22일에 장애·노령 보험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했다. 70세 이상이 되었거나, 또는 산재와 무관한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획득 불능이 되었을 경우에 지급되는 연금에 대해 규정한 법안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이전부터 “노년에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예상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만족하고, 훨씬 다루기 쉽다”고 평가했다.[313] 그러나 이 법안에 비스마르크가 냉담하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이것을 불식시키기 위해 제국 의회에서 연설을 하고, 특히 보수당 의원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찬반에 의견이 갈린 정당이 많아, 소속 의원 전원이 찬성표를 던진 정당은 없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어 장애·노령보험법이 성립했다.

이러한 보험법은 내용에 큰 변경이 가해지면서도 오늘날 독일에도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314]

그러나 근본적인 저임금과 보호 관세에 의한 물가 급등 등으로 노동자의 불만은 이것만으로는 수그러들지 않고, 결국 노동자는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흘러갔다. 그 한편으로 사회주의 노동자당 내부에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에 일정한 평가를 내리는 세력도 출현하여, 이것으로 인해 동당에 분열 상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비스마르크의 사회정책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기 때문에 1880년대 후반에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자 비스마르크는 사회정책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2. 5. 4. 복지 국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80년대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하여 독일을 복지국가로 만들었다.[438] 그가 시행한 사회보장제도는 건강보험(1883년), 산업재해보험(1884년), 노령연금, 장애인연금보험(1889년)이 있다.[438]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이 국가에 불만을 갖지 않도록 하여 혁명을 예방하고자 했다.[438] 보수정치가인 비스마르크가 사회 안정을 위해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복지국가를 좌파라고 주장하는 논리가 근거 없음을 보여준다.[438]

1880년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 사진


비스마르크의 사회 입법은 산업화로 촉발된 사회 문제에 대한 반응이었다.[76] 그는 1880년대에 독일에서 현대 복지 국가를 구축했다.[77] 비스마르크는 노동자들에게 더 큰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독일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자 했다.[79] 부차적인 목표는 사회민주당을 제압하는 것이었다.[79]

1884년 3월, 비스마르크는 노동자의 진정한 불만은 삶의 불안정성에 있다고 말했다.[81]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적 측면 없이 보수주의자들에게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하고자 했다.[82] 그는 1881년 11월 제국 의회 메시지를 통해 "실용적 기독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82]

1883년에 통과된 질병보험법은 독일 산업 노동자들에게 질병보험을 제공했다.[85][86] 의료 서비스는 지역 기반으로 설립되었으며, 비용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분담했다. 고용주는 3분의 1을, 노동자는 3분의 2를 부담했다.[83]

비스마르크 정부는 1884년 산업재해보험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프로그램의 혜택은 의료 치료와, 노동자가 완전히 장애를 입은 경우 획득 임금의 최대 3분의 2에 해당하는 연금을 지급했다. 이 프로그램은 1886년 농업 노동자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83]

노령 연금 프로그램은 70세에 도달한 근로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설계되었다. 장애 보험 프로그램은 영구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의도되었다.[88]

1880년대 비스마르크가 시행한 사회 입법은 독일에서 미국으로의 이민 감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4]

2. 5. 5. 경제 정책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알자스로렌 지방을 획득하고,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과 국내 시장 통합으로 독일은 경제 호황을 누렸고, 새로운 기업들이 많이 생겨났다.[41] 그러나 1873년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과 주가 폭락으로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노동자들이 대량 실업을 겪었다.[41]

1877년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 대신 독일 보수당과 중앙당의 지지를 얻고자 기존의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하고 중앙 정부에 대한 지방 정부의 부담금을 증액했다.[41] 이러한 정책 변화는 국민자유당과의 결별을 초래했지만, 보수당 및 중앙당과의 결속을 강화했다.

1880년 에센의 크루프 공장


1875년 이후 비스마르크 정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협력 관계는 종식되었다.[292] 1873년~1896년 세계공황 속에서 자유주의 세력은 자유무역 유지와 보호무역 전환을 놓고 분열했다. 비스마르크는 1875년 말경부터 보호무역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1876년 4월 말 자유무역을 주장하던 제국 총리부 장관 델브뤼크가 사임했다. 1879년 2월 보호관세 법안을 제국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켰다.[295]

이에 국민자유당은 분열되었고, 자유무역을 지지하며 비스마르크와의 연대를 거부한 좌파 의원들은 독일 진보당과 합류하여 독일 자유사상가당을 결성했다.[296]

2. 6. 사직

1888년 3월 9일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그와의 돈독한 관계를 통해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는 내용의 추모사를 낭독했다.[330] 빌헬름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후두암을 앓고 있었고, 재위 99일 만인 1888년 9월 15일에 사망했다.[439] 그가 행한 일은 내무장관 푸트카머의 해임뿐이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부인인 빅토리아가 비스마르크와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439]

이후 29세의 빌헬름 2세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비스마르크의 신중한 외교 정책에 반대하고 독일의 "태양 아래의 위치"를 확대하기 위한 팽창을 선호하였다.[89]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를 “호엔촐레른가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평가했고[332], 즉위 전부터 빌헬름 2세와 그의 생모인 빅토리아의 대립을 부추기며 늘 빌헬름 2세를 지지해왔다.[333] 그러나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같은 위대한 신하가 있으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대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측근의 충고에 영향을 받았다.

1888년 9월 말, 『독일 평론』이라는 잡지에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을 자유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의 일기가 게재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국가 반역죄로 발매 금지하고 궁정 법률 고문관 하인리히 게프켄을 체포했으나 법원은 증거 불충분으로 재판을 중단했다.[335] 이 사건으로 여론이 부정적으로 돌아서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89년 5월, 루르 지역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발생하자, 황제는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며 노동자 보호 입법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국가 개입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36]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영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로 인해 황제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했고, 황제는 친정(親政) 의지를 강화하게 되었다.[337][338]

1890년 1월 24일의 칙령 회의에서 황제는 노동자 보호 칙령 계획을 발표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우선해야 한다며 미루었다. 황제는 사회주의자 진압 법안에 대해 추방 조항을 폐기하더라도 법안 자체를 무산시키지 않겠다는 성명을 요구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반대하며 사임을 암시했다. 결국 다음 날 제국 의회 본회의에서 사회주의자 진압 법안은 부결되었고, 2월 4일에는 노동자 보호 칙령이 발표되었지만 비스마르크는 부서를 거부했다.[340]

2월 20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카르텔 3당(보수당, 제국당, 국민자유당)이 패배하고 중앙당・자유사상가당・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약진했다. 3월 2일 각의에서 비스마르크는 헌법 개정에는 군주와 자유 도시 참사회의 동의만으로 충분하다는 헌법론을 설명하고, 의회를 무시하는 정책을 제시했다.[342]

3월 4일, 황제는 비스마르크에게 사회주의자 진압법 제출 중단을 명령했고, 비스마르크는 이를 승낙했다.[343] 또한 비스마르크는 각료들에게 1852년 각의 명령 준수를 요구했는데, 이는 장관이 프로이센 왕에게 상주할 경우 총리의 보고와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이를 비스마르크가 자신을 총리의 관리하에 두려는 시도로 간주하고 분노했다.[344]

3월 15일, 황제는 비스마르크에게 정당 대표자와의 협상을 금지하고, 1852년 각의 명령 폐지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1890년 3월 18일 황제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황제는 즉시 수리했다.[96] 비스마르크는 레오 폰 카프리비에게 제국 총리이자 프로이센 총리 대신 직을 계승하였다.[97]

|섬네일|210px|왼쪽|비스마르크 해임의 풍자화]]

|thumb|left|1890년 총리직 마지막 해의 비스마르크, 훈장 H. 슈바베 제작, 앞면]]

|thumb|left|은퇴한 비스마르크의 렌바흐 그림 (1895)]]

2. 7. 말년



1895년, 80세의 비스마르크


정계 은퇴 이후 비스마르크는 바르친(Varzin)과 함부르크 인근의 프리드리히스루에서 지냈다.[103] 프리드리히스루에는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와 경의를 표했고, 1895년 4월 비스마르크의 80회 생일에는 450개 이상의 도시들이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고, 9875통의 전보와 45만 통의 편지를 보내는 등 절정에 달했다.[102]

비스마르크는 다시 공직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개인 자격으로 정치 문제에 대해 언급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며 신문 사설 등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간헐적으로 나타냈다. 1890년 10월부터 약 2년간 회고록 집필에 주력했고, 해임 이후에도 빌헬름 1세와의 돈독했던 관계를 회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다만 빌헬름 2세에 대한 개인적 비판은 자제했다.[104]

1894년 12월 27일 부인 요하나 폰 푸트카머가 바르친에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었다.[348] 퇴임 이후에도 정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1896년 10월 24일자 함부르크 지역신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동맹 체제 구축' 옹호와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 맺은 재보장조약을 연장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1896년부터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여 괴저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를 거부하여 걷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1898년 7월에는 휠체어를 사용하고 호흡 곤란을 겪는 등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1898년 7월 30일 오후 11시에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리드리히스루에서 83세의 나이로 임종했다.[103] 그의 유해는 비스마르크 영묘에 안치되었으며, 석관에는 "빌헬름 1세 황제의 충성스러운 독일 신하"라는 글귀가 새겨졌다.[104]

말년에 회고록 (''Gedanken und Erinnerungen'', 또는 ''사상과 기억'')을 집필하여 빌헬름 2세를 공격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서술하는 등 불화를 이어갔다. 그는 러시아와의 재보험 조약 내용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는 국가 안보에 대한 중대한 위반 행위였다.

3. 사후

함부르크의 비스마르크 기념물


비스마르크가 임종을 맞았을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북해에 있었다. 북해에서 비스마르크의 사망 소식을 들은 빌헬름 2세는 급히 함부르크의 인근 작은 도시인 프리드리히스루에 와서 비스마르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가족에게 장례식을 국장으로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가족들은 그러한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비스마르크의 시신은 그의 희망에 따라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묻혔다.

4. 평가와 비판

오토 폰 비스마르크 기념물, 베를린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동상


역사가들은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지난 125년 동안 비스마르크의 이미지가 지닌 중요성과 기능과 내용에 관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냈다.[105][106]

비스마르크는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정치가로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108] 수 백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 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독일 제국 수상으로 있을 때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를 받는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실용적인 외교 정책 덕분에 독일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비스마르크의 이후 강경 정책 때문에 주요 예외였으며, 유럽에서 독일의 가장 적대적인 적 중 하나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가 독일 제국의 평화로운 성격을 확신하는 한 프랑스의 적대감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109] 그러나 그의 외교적 업적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다른 유럽 열강을 독일과 대립하게 만든 빌헬름 2세 황제의 정책에 의해 무너졌다.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가 되도록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약화시켰다.[111] 헨리 키신저는 20세기 독일을 위한 이러한 유산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자유주의를 너무 철저하게 훼손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은 자유주의를 성공시킬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13]



노먼 리치에 따르면, 비스마르크 외교의 성공은 어떤 시스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그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냉정한 국가 이익 평가와 다른 강대국의 국가 이익에 도전하지 않도록 주의한 점, 그리고 국가 권력의 질과 그 한계를 인식한 점이 중요했다.[115]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심리와 개인적 특성은 학자들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역사가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그를 깊이 복수심에 찬 악마 같은 천재로 묘사한다.[118] 에반스는 그가 "위압적이고 무원칙하며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했지 강점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117] 스타인버그, 에반스, 테일러, 팔머를 포함한 영국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를 모순적인 인물로 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보다 덜 숙련된 후계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시스템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반사회주의 법률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적 반대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문화투쟁을 벌였으나, 가톨릭교도들의 보수주의가 그들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패배하고 입장을 바꾸어 가톨릭/중도의 지지를 얻고 자유주의자들을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는 1930년대까지 독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지배적인 기억은 1860년대 모든 적, 특히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일을 통일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및 외교 세력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영웅이었다. 로베르트 게르바르트는 그의 은퇴 시절과 사후에 더욱 강력하게 형성된 비스마르크 신화가 강력한 수사적, 이념적 도구임을 보여준다.[127]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평화 지향적인 "포화 대륙 외교"가 팽창주의적 추진력을 의식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점점 인기가 없어졌다고 지적한다.[110] 독일 대중은 팽창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비스마르크의 접근 방식과 대조적으로 빌헬름 2세의 ''벨트폴리티크''는 팽창을 통해 제국의 미래를 확보하려 했고, 이는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110]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와 복지 프로그램 지지를 가르침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려 했다.[111] 그러나 헨리 키신저는 이러한 유산이 20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를 훼손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이 자유주의를 성공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113]

비스마르크의 심리 및 개인적 특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역사가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그를 친구와 가족에게조차 복수심에 찬 악마 같은 천재로 묘사하며,[118] 에반스는 그가 "위압적이고 무원칙하며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했지 강점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117]

비스마르크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반사회주의 법률 등을 통해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려 했으며,[119] 문화투쟁을 벌였으나 가톨릭교도들의 보수주의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꾸어 가톨릭/중도의 지지를 얻고 자유주의자들을 반대했다.[119]

로베르트 게르바르트는 은퇴 시절과 사후에 형성된 비스마르크 신화가 강력한 수사적, 이념적 도구임을 보여준다.[127] 이 신화는 그를 독단적인 이데올로그이자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만들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무기로 사용되어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의 정치 문화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127]

예를 들어 한스 울리히 벨러는 비스마르크의 “제국의 적”이라는 발상은 “민족의 해충”을 제거하는 “민족 공동체” 사상의 싹이며, “수정의 밤”의 길로 통한다고 말한다. 또 테오도르 모멘젠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영향은 이익보다 해가 무한히 크다. 힘의 측면에서는 얻는 것이 있었다 해도, 그런 것은 다음에 찾아올 세계사의 폭풍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인의 인격과 정신이 노예화되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모멘젠은 1903년에 사망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 나치 독재 정권,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예상한 것 같은 예언이었다. 한편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한스 로트펠스는 “우리는 비스마르크가 많은 불쾌한 현대사에 길을 마련한 것에 대해 훌륭한 근거를 들어 비판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거의 모든 점에서 비스마르크가 하기를 거부한 일을 실행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반론하고 있다. 독일 출신의 미국 정치가 헨리 키신저도 2011년에 『뉴욕 타임스』지에서 “비스마르크는 합리주의자였지만, 히틀러는 몽상적인 허무주의자였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한계와 세력 균형을 중시했지만, 히틀러는 절도와 자제가 결여되어 있었다. 유럽 정복이라는 발상은 비스마르크에게는 없었다. ‘정치란 역사 속에 남겨진 신의 발소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고, 그 박자에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는 것이다’라는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말을 히틀러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논하고 있다.[359]

현재의 독일 역사학자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의 『』 논쟁을 감안하여 비스마르크나 제2제국을 히틀러나 제3제국에 직접 연결짓는 것을 꺼리는 것이 일반적이다.[361]

또 사회주의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비스마르크를 악담하는 편지를 방대하게 남기고 있지만, 그들조차도 독일 통일이나 나폴레옹 3세 타도에 관한 비스마르크의 의의를 전혀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다.“역사의 아이러니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나폴레옹 3세를 쓰러뜨리고, 소독일주의 제정뿐만 아니라 프랑스 공화국도 수립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결과는 유럽에서 큰 여러 민족의 독립과 내적 통일이 하나의 사실이 된 것이다. 1848년 혁명의 무덤 파는 사람이 그 유언의 집행자가 되었다”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엥겔스가 책 표지에 게재하고 있다.[362]

비스마르크의 정치 수법은 “현실주의자”라고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비스마르크는 원래 강경 보수 게를라흐 형제에게 자신의 신념을 계승하는 자로 기대되어 정계에 들어섰지만, 얼마 후 강경 보수 사상에서 멀어져 갔다. 그에게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와도 타협할 준비가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전 독일 노동자 동맹의 당수 페르디난트 라살과 접근한 것은 앞서 언급했지만, 라살 사후인 1865년에는 제1인터내셔널을 지휘하는 카를 마르크스에게 눈을 돌려 로터 부하를 통해 마르크스에게 “관보의 지면을 열어 줄 테니, 거기서 정치 경제 평론을 쓰지 않겠는가. 물론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써도 좋고, 어떤 제약도 가할 생각은 없다”라고 제안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거부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손을 잡는 상대를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예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아우구스트 베벨은 “쓸모 있다고 생각하면 악마와도 그 어미 짐승과도 동맹을 맺으려는 남자”라고 평가했다.

비스마르크는 회고록에서 게를라흐는 “비현실적인 이론가”, 자신은 “행동적인 실천가”였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에 대해 에리히 아이크는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행동의 동기를 외부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정치 이론을 때때로 사용했지만, 그 이론이 실제 행동에 짐이 된다는 것이 명확해지면 쉽게 그것을 버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363]

이와 관련하여 비스마르크를 “보나파르티즘”에 분류하는 경향도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보나파르티즘은 근대 부르주아의 진정한 종교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자신은 직접적으로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보나파르티즘적 반독재가 정상적인 형태가 된다. 이 독재는 부르주아의 이익을 부르주아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실현하지만, 지배권 자체에 대해서는 일부분도 부르주아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독재도 부르주아의 이익을 마지못해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이 국민 협회의 강령조차 채택하는 비스마르크 씨이다.”라고 말한다. 벨러는 “비스마르크의 보나파르티즘적 성격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국왕의 하인이며 황제의 재상이라는 군주주의적이고 전통적인 의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비스마르크 이전의 각료 정치가들과 비스마르크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의 정치적 연기인 ‘현대적 요인’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것은 바로 ‘보나파르티즘’적 특성이다. 이 특성은 국내 문제에서도 대외 문제에서도 반복적으로 행해진 모험 정책, 보통 선거에 의한 조작, 선동의 교묘함, 정당성 경시, 보수적이고 혁명적인 양극성 중에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라고 평가한다. 세바스찬 하프너는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달리 왕위 찬탈자는 아니지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성공을 요구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에게 확실히 닮았다”“항상 빌헬름 1세에게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 때문에 항상 위기에 처해 있고, 항상 성공을 거두는 것을 필요로 했다. 그것이 위기를 부추겼다가 갑자기 신중해지는 이유이다”라고 평가한다.

4. 1. 평가



역사가들은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지난 125년 동안 비스마르크의 이미지가 지닌 중요성과 기능과 내용에 관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냈다.[440][441]

비스마르크는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정치가로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442] 수 백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 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독일 제국 수상으로 있을 때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444]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를 받는다.[444]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실용적인 외교 정책 덕분에 독일은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비스마르크의 이후 강경 정책 때문에 주요 예외였으며, 유럽에서 독일의 가장 적대적인 적 중 하나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가 독일 제국의 평화로운 성격을 확신하는 한 프랑스의 적대감을 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109] 그러나 그의 외교적 업적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다른 유럽 열강을 독일과 대립하게 만든 빌헬름 2세 황제의 정책에 의해 무너졌다.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가 되도록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약화시켰다.[111] 헨리 키신저는 20세기 독일을 위한 이러한 유산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자유주의를 너무 철저하게 훼손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은 자유주의를 성공시킬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113]

노먼 리치에 따르면, 비스마르크 외교의 성공은 어떤 시스템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 그의 자질에 달려 있었다. 냉정한 국가 이익 평가와 다른 강대국의 국가 이익에 도전하지 않도록 주의한 점, 그리고 국가 권력의 질과 그 한계를 인식한 점이 중요했다.[115]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심리와 개인적 특성은 학자들로부터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역사가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그를 깊이 복수심에 찬 악마 같은 천재로 묘사한다.[118] 에반스는 그가 "위압적이고 무원칙하며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했지 강점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117] 스타인버그, 에반스, 테일러, 팔머를 포함한 영국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를 모순적인 인물로 보며,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보다 덜 숙련된 후계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시스템을 남기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비스마르크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반사회주의 법률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적 반대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문화투쟁을 벌였으나, 가톨릭교도들의 보수주의가 그들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패배하고 입장을 바꾸어 가톨릭/중도의 지지를 얻고 자유주의자들을 반대했다.

비스마르크는 1930년대까지 독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지배적인 기억은 1860년대 모든 적, 특히 프랑스를 물리치고 독일을 통일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및 외교 세력으로 만들었던 위대한 영웅이었다. 로베르트 게르바르트는 그의 은퇴 시절과 사후에 더욱 강력하게 형성된 비스마르크 신화가 강력한 수사적, 이념적 도구임을 보여준다.[127]

4. 2. 비판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공감대를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여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443][445] 그는 철저한 '현실정치가'였는데, 이러한 자세는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었으며,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이나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43][445]

역사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평화 지향적인 "포화 대륙 외교"가 팽창주의적 추진력을 의식적으로 억제했기 때문에 점점 인기가 없어졌다고 지적한다.[110] 독일 대중은 팽창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비스마르크의 접근 방식과 대조적으로 빌헬름 2세의 ''벨트폴리티크''는 팽창을 통해 제국의 미래를 확보하려 했고, 이는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110]

비스마르크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와 복지 프로그램 지지를 가르침으로써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약화시키려 했다.[111] 그러나 헨리 키신저는 이러한 유산이 20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를 훼손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이 자유주의를 성공시키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113]

비스마르크의 심리 및 개인적 특성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역사가 조나단 스타인버그는 그를 친구와 가족에게조차 복수심에 찬 악마 같은 천재로 묘사하며,[118] 에반스는 그가 "위압적이고 무원칙하며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했지 강점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117]

비스마르크는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반사회주의 법률 등을 통해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려 했으며,[119] 문화투쟁을 벌였으나 가톨릭교도들의 보수주의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꾸어 가톨릭/중도의 지지를 얻고 자유주의자들을 반대했다.[119]

로베르트 게르바르트는 은퇴 시절과 사후에 형성된 비스마르크 신화가 강력한 수사적, 이념적 도구임을 보여준다.[127] 이 신화는 그를 독단적인 이데올로그이자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만들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무기로 사용되어 독일 최초의 민주주의의 정치 문화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127]

5. 기타

5. 1. 비스마르크에 대한 오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철혈 재상'이라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그의 반대파가 그를 폄하하기 위해 과장한 측면이 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혈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통일 이후에는 평화주의적 정책으로 전환하여 평화 유지에 힘썼다. '철혈 재상'이라는 말은 비스마르크를 왜곡하고 모함하는 말이다.

실제 비스마르크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감상적인 성향도 있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고, 1879년 당시 체중은 약 123kg이었다. 영국 수상 벤자민 디즈레일리 앞에서 폭음폭식하는 모습을 보여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880년대에는 의사의 지시로 식이요법을 하기도 했다.

충치치과의사에게 치료받는 것을 무서워하여 안면신경통을 앓았고,[351] 불쾌한 일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는 불면증에 시달렸다.[352] 건강하지 못한 생활로 병약하여 자주 영지로 돌아갔고, 제국 의회에서 앉아서 연설하는 경우가 많았다.[351] 그러나 당시로서는 장수인 83세까지 살았다.

소나무를 좋아하여 일본, 북미, 남미, 레반트 등에서 수입한 소나무를 자택 주변에 심었다. 달걀을 좋아하여 한 번에 15개나 먹기도 했고, 스테이크에 반숙 달걀 프라이를 올려 먹는 것을 즐겼다. 이 때문에 삶은 아스파라거스피자 등에 달걀 프라이를 올린 음식을 "비스마르크식"이라고 부른다. 해산물 중에서는 잉어, 연어, 송어, 캐비어, 을 즐겨 먹었고, 굴을 175개나 먹은 적이 있다는 것을 자랑했다.

비스마르크는 주당이었으며, 맥주, 와인, 샴페인을 물처럼 마셨다.[353] 독일 와인인 슈타인벨거를 좋아했지만, 독일산 스파클링 와인은 싫어했다.[353] 빌헬름 2세에게 독일산 스파클링 와인의 맛이 형편없다고 말하며 "신하들에게 있어서 애국심은 위장 입구 근처에서 멈춰 버립니다"라고 비꼬아 황제를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사냥, 승마, 독서, 낚시였다. 특히 사냥을 즐겨 보불전쟁 당시 적지에서도 사냥을 했고, 러시아 대사 시절에는 곰 사냥에 빠져 큰 곰을 사살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성경, 특히 욥기와 이사야서를 즐겨 읽었다.

6. 저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사직 후에 《회상록(Gedanken und Erinnerungen)》(3권, 1898~1919)을 정리했으며, 이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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